플라톤, 매트릭스 그리고 이퀼리브리엄

요즘 서양철학사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있습니다.
단편, 단편만을 취하다 보니
전체적인 흐름을 읽는데 다소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철학함이란,
단순히 다양한 철학가들의 생각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함이란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이고,
그에 따라서 자신이 기존의 철학가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생각, 환경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로
기존의 해석을 따라가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보다 훨씬 깊은 사유를 했던 철학가들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의미있는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잃어버리는 행위는 철학함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서양철학사의 시작에 들어서면 우리는 너무나 엄청난 거장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플라톤'입니다.
아마 고등학교까지 정규교육을 마친 분이라면,
한번쯤 이름을 들어보았을 듯 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제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광장으로 나아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는 행위로 익히 알려진 사람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은 지금에서는 너무나 많이 알려진 말이기도 하지요.
소크라테스가 광장(아고라)으로 나아가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했던 '성(聖)인'이라면,
그에 비해 플라톤은 '현자'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플라톤을 주목해야 되는 이유는
처음으로 이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사유를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많은 글을 남기며 해왔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을 펼쳐나갔던 인물인 것이죠.
물론 이 때의 플라톤에게 있어서의 세계는 지금의 동양, 호주 등을 포함하지 않는
지중해를 거점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곳이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21세기라고 불리는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플라톤, 그를 아는 것은
서양철학사 - 서구인들의 인식체계를 절반정도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고요.
플라톤의 다양한 생각중에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이데아'론입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현실에서 보이는 '감각적'인 것은 모두 진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플라톤에게 있어서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감각으로 인지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삼각형을 그려도
그려놓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정확히 180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180.1이 될 수도 있고 180.001이 될 수도 있지만
정확하게 180.0000000000000000... 이 되게 그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동시에 원을 정의대로 명확하게 그린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기계의 힘을 빌린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을,
원이라는 것이 한점에서 같은 길이만큼 떨어진 점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기하학이라고 생각하는 것,
추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현실의 감각적인 것보다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인간의 정신(비감각적인 것)은 육체(감각적인 것)속에 갇혀있으며,
육체가 생존해 있는 동안 자유롭지 못하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인간의 '정신'이 '육체'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감지될 수 있는 것'보다 '감지될 수 없는 것'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감지를 통해 얻어지는 자연과학'보다 '감지할 수 없는 수학'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시기에 자연과학이 따로 분화되어 있지는 않았겠지요.)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느낄 수 있는, 그러나 아주 정반대로 느낄 수 있는 영화가 바로 '매트릭스'입니다.

매트릭스의 영화에서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신들이 육체가 자신들의 '영혼 - 사이버스페이스'에 묶어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는 플라톤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플라톤은 '영혼이 육체에 묶여 있다'라고 하였으니 말입니다.
매트릭스는 플라톤에 비해
육체적인 것, 감각적인 것에 더 높은 점수를 부여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퀼리브리엄'이라는 영화가 바로 플라톤의 생각과 정확히 밀접해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사람들에게 문학과 사상을 없앰으로서,
사유하지 못하게 하는 약을 먹임으로서,
그 사회의 사람들은 사유할 능력을 빼앗기게 됩니다.
'영혼의 자유로움'을 '동일한 움직임을 반복하는 육체'에 가두어 버린 것이지요.
두 영화를 보신다면 플라톤을 이해하기가 훨씬 더 쉬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영화의 포스터에 '매트릭스는 잊어라'라고 나오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군요. CG에 관련하여 마케팅적으로 저런 문구를 썼었지만, 오늘 주제에 관련해서 생각해 보아도 묘하게 잘 어울리는군요.)
우리는 종종 플라톤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실험을 통해 얻어진 사실보다 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직관을 통해 얻어진 사실을 높게 평가하기도 하고,
일상사를 풀어낸 소설보다 함축적인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시'를 높게 평가하기도 합니다.
흔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보다는 그것을 추상화한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현시대에서 플라톤을 이야기하고 있고
플라톤에 대해 동의를 하든, 반대를 하든
플라톤의 세계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플라톤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습니다.
흔히,
플라톤을 근대 합리주의자들의 선구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근대 합리주의 철학자들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것이 단순히 '관념의 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아테네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그의 의지였으니 말입니다.
(근대의 합리주의 철학자들은 단순히 사회의 변화보다는 머릿 속으로만 '사유'하는 것을 중요시했고, 이는 나중에 '사변적', '관념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플라톤을
단순히 서양철학사의 시점에 위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 동양, 현재 - 에서도 의미가 있는,
단순히 '서양'철학사에 국한시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여전히 던져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 대해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Hope |
2007/07/24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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