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 도표화, 기승전결, 형식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회 발표가 있습니다.

한국화학공학회라는 나름대로 큰 학회인데 그 곳에서 포스터 발표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포스터를 제작하려다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모든 포스터는 똑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사실 형식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 최적의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 형식은 그 자체로 유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형식이 마치 포스터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순간,

그 형식 자체가 과학이 되어버리고, 공학이 되어버립니다.


동시에 새로움 역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학회 포스터는 말그대로 형식 그 자체가 포스터입니다.

누구나 그러한 것을 기대하고,

누구나 거기까지 밖에 생각하지 않으며,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똑같은 형식을 취하더라도 다른 형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오로지 그 형식 밖에 취하지 않았던 사람은 매우 다릅니다.

마치 새장 안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그 외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까요?


포스터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다가 기존의 포스터에 일관되게 발견되는 양식을 발견했습니다.

우선 도표화입니다.

과학이나 공학에서 도표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얻어진 데이터를 나열하는 것에 있어서 도표가 흔히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도표가 과학이나 공학의 전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표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포스터 그 자체가 되었고 과학과 공학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과학이나 공학에서는 내레이션(narration)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단순 간결하게, 그리고 한눈에 보여질 수 있는 것만이 선호됩니다.

발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레이션은 과학과 정반대 되는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 결과는 과학이나 공학에 있어서 세세한 부분(detail)을 제거하고

오로지 실험의 결과만을 도표화하여 강조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그 실험에서 보여준 변수만이 해당 실험의 모든 변수인양 비춰질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발견할 수 있는 형식은 기승전결의 구조입니다.

대부분의 포스터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너무나 확실하게 따릅니다.

과학이나 공학에서는 서론-실험-결과-결론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는

역시 이미 과학, 공학 그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전에 이이기했지만 이 형식을 벗어나게 되면 그러한 논문은

객관성이나 합리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는 포스터를 상상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그러한 포스터를 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겠군요.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이라고 불리우는 '극적'연극을 보듯이 말입니다.1


또한 포스터는 항상 네모난 형식으로 짜여지는데

발표 내용에 맞게 그 틀을 바꾸어 보아도 재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앞에서 말했던 문제의식들을 바탕으로 만들고 싶은 포스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동그란 종이에 오로지 내레이션만을 이용하여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고 나열하는 포스터.

내레이션 중간, 중간에 보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서 몰입을 막는 포스터.


이러한 포스터를 만들어서 발표를 하고 싶었습니다.

참으로 재밌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미쳤다고 이야기할지도, 어떤 사람들은 무시할지도,

그러다 한, 두명은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 생각하기도 할 것이고 말입니다.

위에서 제시한 포스터가 기존 포스터의 문제의식에 대한 정답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단지 물음일 뿐이지요.


사실 위에서 제시했던 포스터를 만들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 더 고민해 봐야되는 부분들이 있고,

위와 같이 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한 듯 느껴지기도 하고 말입니다.

아마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을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위와 같은 포스터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과학이란 무엇인지, 공학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조만간 그 날이 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1.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연극 - '극적' 연극은 우리가 평상시에 보는 대부분의 연극을 지칭합니다. 감정이입을 통하여 극을 보게되고 그 안에서 클라이막스를 느끼는 연극을 말합니다. 그에 비해 브레히트가 창안한 서사극은 이러한 감정이입, 기승전결 구조에 대응하여 나타난 연극입니다. 이 연극은 관객의 감정이입 요소를 제거하고 때로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따르지 않으면서 극을 진행합니다. [Back]
2007/04/15 23:01 2007/04/15 23:01

Trackback Address :: http://hyuk.co.kr/trackback/133

Leave a comment !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