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 - 연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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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에 대한 통제


몸을 통한 통제는 가장 편리한 통제입니다. 몸을 통제함으로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생각, 사유등도 함께 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군대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흔히 데카르트와 같은 이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지만, 몸을 통제함으로서 마음도 통제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이원론이 한계를 가지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통제는 훨씬 더 세련된 방법으로 변화합니다. 단순히 몸을 통제함으로서 - 예를 들어서 고등학교때의 두발자유 - 사유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그 자체를 통제해 버리는 것이지요. 더 넓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제약함으로서 정해진 틀 안에서만 사유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생각 중에 현 사회에 타격을 입히지 않는다면 창의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렇지 않는다면 불순한 생각으로 명명되어 지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한국 사회 내에서 몸에 대한 통제가 너무나 쉽게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군사주의 문화가 깊히 박혀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몸에 대한 통제는 '가장 쉬운 통제'이지,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가장 좋은 통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 몸에 새겨진 쇠사슬

통제를 하기 위해서는 개의 목에 줄을 감 듯, 줄의 역할을 할 기제가 필요합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통제는 그 스스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와 같이 행동반경과 행동범위를 제약함으로서 통제를 할 수도 있고, 군대처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나눠서 통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제는 사회 곳곳에 깊숙히 숨어들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는 두발의 자유를 갖지만, 학생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군대 내에서 병장이 할 수 있는 행동과 이병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차별됩니다. 회사 내에서 신입사원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위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제약됩니다. 이에 비해 몸에 고통을 줌으로서 하는 통제는 정말 가장 말초적이고, 확실한 행동인 것이지요. 몸 그 자체에 고통을 줌으로서 고통과 두려움을 쉽게 각인시키기 때문입니다.


- 통제를 위한 연대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몸에 대한 고통도 역시 망각됩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통제의 요소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더 효율적인 통제 기제가 발동됩니다. 그것은 바로 '연대'라고 '불려지는' 행위들입니다.  고통에 대한 기억이, 두려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면, 동시에 그러한 고통을 주는 사람이 사라진다면 통제는 거기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제를 원하는 사람들은 피통제자가 스스로가 알아서 통제할 수 있게 되길 원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것을 '자치' 혹은 '자율'이라고 부릅니다.
가장 초반의 통제가 통제자 한명으로 이루어졌다면, 더 나은 통제는 통제자를 더욱 늘려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막판에는 본인이 통제자이자, 피통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제화 과정에서 통제자를 늘려가는 행위 - 연대라는 행위가 많이 사용됩니다.
통제를 위한 연대는 두가지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나는 조직과의 일체감을 통해서 실체화된 조직과 나를 동일시하는 과정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굳이 노골적으로 교육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함으로서 계속해서 소속감을 안겨주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통제자의 확장입니다. 한명의 통제자가 이제 연대라는 행위를 통해서 다수의 통제자를 확보하게 됩니다. 소속감에 해를 입히는 행위는 가차없이 연대라는 이름으로 인해 처벌받게 되는 것입니다.


- 창조적 연대

연대라는 것이 서로가 서로를 통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다른 생각들을 제약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볼테르가 했던 유명한 말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말할 자유를 위해서는 함께 하겠다.' 이 말에 연대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연대라는 행위가 통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자유를 갖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좀 더 많은 자유 안에서 좀 더 다양한 생각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창의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이미 존재하는 정답을 이야기하는 것에서는 결코 창의성이 생겨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 첨언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지켜야 될 최소한의 예의, 책임은 결코 통제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어떠한 부분들이 사회의 전제 조건이며, 어떠한 부분들이 필요치 않은 통제의 영역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가 약속된 시간을 지키는 것, 그것은 통제의 범위가 아닙니다. 가장 기본적인 모임의 조건이겠지요. 무엇이 통제이고, 무엇이 기본적인 전제 조건인지 냉철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2008/02/24 10:53 2008/02/2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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