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몸,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성의 상품화 그리고 저항의 가능성
《여성의 몸,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성의 상품화 그리고 저항의 가능성》
「제2장. 강간: 강요와 동의에 대하여 - ‘캐서린 맥키넌’」
페미니즘 분석에서, 강간은 고립된 사건이나 도덕적 일탈, 혹은 개인적 차원의 잘못된 관계가 아니라, 마치 개인적 형벌처럼, 체계적 ∙ 집단적 종속의 맥락 안에서 행해지는 테러요, 고문이다. 그에 비해 법적으로 강간이란, 그것이 성관계처럼 보일 때에는 범죄로 간주되지 않는 성적 범죄이다. 법은 강간을 “강요 ∙ 강제에 의해, 동의 없이 이루어진 성교”라고 정의한다. 동시에 강간 범죄는 성기의 삽입에 중심을 둔다. 강제적 겁탈로부터 여성의 성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은 그 보호를 남성의 성기 개념으로 정의한다. 이는 여성의 성적 위엄이나 고결함을 해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성에 대한 일부일처주의를 위반한 범죄로서 읽혀진다.
맑스주의적 분석에서는 사유재산 개념에 의거한 강간에 대한 분석이 종종 제기된다. 그러나 문제는 성이 재산으로 사유되었을 때에도 남성은 그것을 소유함에 비해, 여성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못한다. 여성들은 성을 ‘갖는’ 순간 - 젠더와 섹슈얼리티 - 그것은 그들로부터 상실된다. 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을 빼앗긴다는 것과 같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강간을 성적 행위가 아니라 모든 여성들에게 그 위협이 가해지는 폭력행위로 재해석했다. 다른 이들은 강간을, 그 폭력성까지도 포함하여, 그 사회적 명령이 모든 여성들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규정하는 남성 성욕의 표현으로 본다. 수잔 브라운의 경우에는 폭동, 전쟁, 학살, 혁명시의 강간 및 경찰, 부모, 교도관에 의한 강간, 인종주의에 의해 촉발된 강간을 검토한다. 강간을 ‘성행위가 아니라 폭력’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요점은 폭력(강간)을 거부하는 동시에 성행위(이성애)를 긍정할 비성적인 토대를 주장하는 것이다.
개정된 강간 법조문들은 성행위와 폭력을 구별한다는 명목 아래 강간을 성적인 폭력으로 재정의하려고 시도했다. 보통 폭력은 법안에서 동의를 받지 못한다. 하지만 성적인 영역 안에서 무엇이 힘으로 보이느냐, 따라서 폭력으로 간주되느냐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성과 폭력이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닌 상호규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은 한, 여성들이 살며 체험하는 대부분의 강간은 여성에 대한 폭행으로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강간에서 어떤 폭행이 있었는가’ 하고 묻는 대신에, 그들의 경험은 ‘성교에서 폭행이 아닌 게 무엇이 있는가’가 문제의 핵심에 다가갈 적당한 질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강간법은, 긴장과 불평등이라는 저변의 구조를 드러내지 않은 채, 동일한 힘의 조건 아래에서 성적 선택을 자유로이 하는 것을 가리켜 ‘동의’라고 제시한다. 근본적으로 남성들이 보기에 욕망할 만한 것은 여성적 힘의 형태를 지난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그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충족을 거부하기 때문에 남성이 성욕을 느끼는 것이나, 성행위를 거부하는 것 모두 여성 탓으로 돌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힘의 사용을 합리화한다.
모든 여성들은, 그들의 실질적 동의가 그들이 속한 범주 내의 전형적 경우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정도로만 고려된 채, 평행선을 긋는 두 영역 안에 편입되어 있다. 정숙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강간을 남성들의 성적 용어들로 정의하고 나니, 이제 법의 문제는 구체적 사건들 안에서 강간과 성행위를 구별해 내는 일이다. 강간과 성교를 구별할 때 공통적으로 여성의 ‘의지’에 대한 어떤 평가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법이, 혹은 피고가 어떻게 여성의 의지를 안단 말인가? 몇몇 주에서는 이에 대한 답으로 강제력과 비동의의 측면이 비추어지고 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여성들이 수동적 수용성으로 사회화되어, 순응 이외의 대안을 갖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강간을 폭력이지 성행위가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에, 누가 여성의 성을 통제하는가 하는 문제와 그것을 규정하는 지배/종속의 역동성의 문제를 회피해 버린다. 만약 성행위가 정상적으로 볼 때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행하는 무엇이라면 문제는 폭력이 있었느냐라기보다는 동의가 의미있는 개념인가 하는 것이다.
구타는 보다 깊은 단계에서 성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가장 대담한 용어로 말한다면, 성욕은 폭력적이다. 아마 그래서 폭력이 성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들에 대한 폭력은 이 두 의미가 다 적용됨으로써 성적이다. 즉 이중으로 성적인 것이다. 성행위를 성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시각이 구타와 강간을 구별하는 지점은 바로, 기존의 법과 성행위 아닌 폭력으로 강간을 간주하는 견해가 양자를 구별하는 그 접점과 일치한다.
스스로 강간당했음을 아는 여성들조차도 법체제가 상황을 자신들과 같은 시각으로 볼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국가는 강간을 지연시키거나 처벌하는 대신 그것을 영속화시킨다. 법적 원칙상으로는 여성의 욕망에 대한 남성의 느낌과 판단이 그녀를 폭행당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냐 아니냐를 결정한다.
남성들은 성에 대한 사회적 관행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리고 행동주의적으로 정해놓는다. 그들은 여성들이 성적으로 폭행당했다고 자신들이 상상하는 대로 강간을 정의하고, 그 이미지와 그들이 늘상 하는 행위의 이미지를 구별하면서, 성적 범죄에 대한 대부분의 고발 사건 앞에 앉아서 판결을 내린다. 여성들이 무엇을 원하든 상관없이 상대 남성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으리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여성들은 생존전략으로서 욕망을, 특히 욕망의 부재를, 무시하거나 가치 폄하하거나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
관점이 상황과 결합되고 상황이 불평등할 때, 다툼을 벌인 상호관계가 강간이라고 권위적으로 간주되는가 아닌가는 누구의 의미가 이기느냐의 문제가 된다. 만약 성이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특히 젠더의 권력관계라면, 동의는 불평등한 조건들 아래에서의 의사소통이다. 그것은 그 여성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 자신이 원하는 바에 대해서 그녀가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바라고 그가 이해했던 것 사이에서 증발해 버린다.
여성들에 대한 성적 폭행이 일상사가 되면 될수록, 그리고 포르노그래피가 합법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면 할수록, 폭행과 성행위를 동일시하는 견해가 더욱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될 것이고, 그럴수록 더욱 적나라하게 여성들은 성교 가능 여부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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