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관계를 지향할 것인가 - '싱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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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이어서 더욱 슬픈 이야기


그것은 일상이었다. 상사에게 이제까지 했던 모든 노력을 반납해야 했고, 직장 상사의 성희롱에는 그래도 한번은 웃어줘야 했다. 그것은 이 사회의 일상이었다. 일상이기에 공감할 수 있지만, 일상이기에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혹자는 이 영화를 보며 공감을 하지만, 혹자는 공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가지 명확한 것은 이 영화에 공감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본인의 사고가 남성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약자에게 냉혹하다. 양은 독수리를 바라보며 언제 공격을 해올까 항상 움츠려 있지만, 독수리는 그런 양을 신경쓰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하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 이 사회의 독수리들은 당연히 양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리가 없다. 단지 양들만이 항상 몸을 움츠리고 있을뿐.

항상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양들이다. 그것도 일부의 양들이다. 대다수의 양들은 어떻게 독수리의 눈에 띄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독수리의 맘에 들 수 있을까 고민을 한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남는 방식이다. 그들은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말하는' 현실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소수의 양만이 현실을 넘어서려고 한다. 그들은 때론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때론 같은 꿈을 꾸는 양들에서 위안을 찾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고독해지기도 한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기에.


- 독수리의 관계

독수리들은 서로를 위로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내부에서조차 누가 더 높게 올라갈 것인가를 겨룬다. 그들은 때론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시는지를 척도로 하여 높이를 정하기도 하며, 누가 더욱더 남성적인지를 척도로 하여 높이를 정하기도 한다. 아니 때로는 신체부위에 이상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로 우위를 정하기도 한다. 그렇게 정한 그들만의 척도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은 결코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독하다. 그들 사이의 관계에 의지란 없다. 독수리임을 뽐내야 하기 때문에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곧 독수리로서의 자각을 저버리는 것과 같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독수리로서의 자각을 저버리지 않기 위한 많은 행동들을 한다. 주량 뽐내기, 권위 내세우기, 양은 양 밖에 되지 못한다고 규정짓는 행위들. 그러나 독수리는 고독하다. 많은 아버지들이 고독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아버지'의 권위를 지키려고 했지만, 날개가 부러지는 순간 더 이상 독수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양의 관계

양들은 서로 자신의 살 길을 모색한다. 영화 '싱글즈'는 바로 다양한 양들의 이야기이다. '하얀거탑'이 독수리들의 이야기였다면, '싱글즈'는 양들의 이야기이다.

양은 결코 순하지 않다. 그것은 60~70년대에나 통할 이야기이다. 양들은 자신의 살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어떤 양은 독수리들의 마음에 들기 위한 노력을 하기도 하며, 어떤 양들은 마치 독수리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영화 싱글즈의 두 양은 살기 위해 고민한다. 한 양은 독수리에게 길들여지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기에 직장사회에서 내쳐지고, 한 양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행동을 단호하게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이 고민없이 편하게 사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양은 양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고민을 갖게 된다. 반면 독수리는 양의 마음을 알려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확률상 후자가 더 높을 것이라는 것은 단지 추측일 뿐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양들에게는 독수리가 가지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양이기 때문에 양으로서 느끼는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을 서로가 나누어 치유할 수 있는 - 모든 양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 능력에 독수리들은 독수리들 사이에서 받은 상처를 나눌 수 있는 양을 찾는다. 그들은 다른 독수리와 자신의 상처에 대해 논하지 않지만, 그들은 자신의 양 앞에서는 거리낌없이 이야기한다.
 

- 희망을 찾는 양을 위하여

독수리는 남성일수도, 혹은 여성일수도 있다. 양 또한 여성일수도, 남성일 수도 있다. 혹은 장애인이나, 성적 소수자가 될 수도 있다. 혹은 외국인일수도 - 외국인 노동자 - 있다. 권칠인 감독은 '뜨거운 것이 좋아', '싱글즈' 두 편의 영화를 통해서 양들의 고민과 용기를 이야기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그만큼 양으로서의 희망, 미래, 비전에 대해 이야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비단 영화 뿐만이 아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라'에서도, 박민규의 여타 소설에서도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단지 막연한 희망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만큼 희망을 쉽게 이야기하기는 쉽지만, 희망에 대해서 설계하기는 말 그대로 너무나 어려워진 세상에 살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고 희망을 놓아버려야 되는가. 그럴 수 없다. 왜냐면 '희망을 찾는 양'은 말 그대로 '희망을 찾는' 것이 본인의 모습이기에 희망을 놓아버릴 수 없다. 그렇기에 꿈과 현실이라는 간극에서 시달리고, 시달린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을 놓아버리기에는 본인이 용납할 수 없다.

"니가 정말 원하는게 뭐야?" - 싱글즈 中

영화 속의 한마디. 원하는 것이 있어도 원한다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사회. 그렇다고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면, 보이지 않는 미래이지만 그래도 나아가고 싶다면,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야 되지 않을까. 영화는 그에 대한 최소한의 조건, 한 가지를 이야기해 준다. 바로 양의 관계인 상호의존적 관계이다. 독수리와는 다르게 양은 서로에게 의존하며 자신의 고민을 극복할 수 있는 여유와 힘을 갖는다. 물론 여기서의 의존이란 종속적인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치 아이가 엄마에게 의지하는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자신의 자아를 지니고 있어도, 서로가 자신의 꿈을 가지고 있어도 이에 대해서 서로 '교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의지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면서 한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힘! 그것은 바로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나온다. 이는 독수리의 개념인 '사수'가 아니다. 서로 간의 '멘토'1이다.

삶을 살면서 많은 좌절과 예기치 못한 사건과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한 것을 혼자 감내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그러한 것이 능력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같이 나눌수도 있다. 권칠인 감독은 '싱글즈'에서는 장진영과 엄정화의 관계를,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는 이미숙, 김민희, 안소희의 관계를 그렇게 설정해 놓는다. 그들이 많은 시련을 겪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힘, 상호간의 멘토에 있다.

20대의 성공과 사랑,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많은 요소들이 필요하겠지만 확실한 것은 멘토의 존재이다. 서로가 상하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같은 위치에서 주고 받는 것, 그것이 필요한 순간이다.

꿈을 놓지 말자. 희망을 져버리지 말자. 그것을 놓게 만드는 것은 사회이기 이전에 본인일 수는 없지 않는가. 



  1. 군대 용어인 사수-부사수의 관계가 상하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면, 멘토는 부족함을 채워주는 자와 채움을 받는 자로 규정된다. 그렇기에 멘토는 상호적인 것이 될 수 있는 반면, 사수-부사수의 관계는 그렇지 못하다. [Back]
2008/02/05 00:32 2008/02/05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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