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홀 - 그에게서 '실천'을 느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즘 스튜어트 홀에 대해서 읽고 있습니다.

문화 이론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저작을 직접적으로 읽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의 저작들을 찬찬히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많은 이론가들이 어느 순간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반면에,

그는 끊임없이 '실천'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나 자세들이

글의 곳곳에서 눈에 뜨인다는 것입니다.


아직 문화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글들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의 생각 저변에 깔려있는 생각들을 살펴보면서

그가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짐작해 보고 있습니다.


그의 저변에 깔려있는 생각은 다름 아닌 맑스주의입니다.

최근 10년전만 하더라도, (그리고 현재에도)

한국사회에서 담론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득세를 하면서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졌습니다.

이론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열광하였고

맑스주의(한국에서 맑스주의라 봤자 거의 대부분이 레닌주의였지만)는 예전의 후광을 잃고

사라지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맑스주의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바로,

맑스가 남긴 텍스트, 행위들에 담긴 다양한 변주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다시 말해서 시대가 지나도 명작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새롭게 읽힐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기에 맑스의 사후에도 맑스를 이해했던 방식은 너무나 다양했고,

홀 역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맑스를 받아들이고 변용합니다.



맑스주의 철학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부분 중 하나는 바로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이야기했던 '사적유물론'입니다.

80~90년도 초반만 하더라도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불리어 왔던 이 이론은

변증법의 인기가 사그러들자 '사적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이데올로기>란

맑스가 그 당시의 독일에 떠돌고 있는 무수한 사변적인 생각들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 썼던 글입니다.

너무도 유명했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의 마지막 테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저는 개인적으로 아직까지 이 문구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의 철학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그의 유물론적 사고를 전개해 나갔던 글이기도 합니다.

그는 <독일이데올로기>를 통하여

그 사회의 주요 담론들이 그 사회의 생산과정들과 가지는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경험만을 나열했던 경험주의는 단순히 사실들을 나열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관념주의는 현실과 동떨어진 상태의 생각을 늘어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기에 전자는 죽은 지식으로, 후자는 사변적인 생각으로 규정짓습니다.


여기서 <독일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 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생산양식이 그 시대의 생각들 - 윤리, 철학등등 - 을 규정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회가 어떠한 생산양식을 따르고 있는지가 곧

그 사회를 결정짓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부구조(그 시대의 생산양식)가 상부구조(법, 윤리, 이데올로기)를 규정한다.' 라는 말도

이를 바탕으로 나온 말입니다.

이는 일정정도 타당하며 그 후에 많은 철학 논쟁의 시발점이 됩니다.  


홀 역시 <독일 이데올로기>에 나타난 맑스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역시 이러한 맑스주의의 틀거리 안에서 자신의 생각들을 이야기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가장 비판이 많이 되었던 부분,

그 사회의 생산양식 만이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 윤리, 법등을 규정하는 것일까?

동시에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 윤리, 법등 역시 그 사회의 생산양식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던 많은 철학자들과 그 고민을 함께 합니다.


그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이 가졌던 생각

- 생산양식을 바꿈으로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 라는 생각을 비판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 중 주요한 이야기로서는

맑스가 설명했던 자본주의의 작동원리 - 즉 시장에 대한 원리 규명, 폭로가

과연 실제 시장과 같은 것이냐는 것입니다.

즉 실제로 '시장'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계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해석했던 맑스의 '시장'이 있을텐데

그 두 시장이 같은 시장이냐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내가 책의 내용을 읽고 그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

'책의 내용'과 같냐는 것입니다.

그 간극은 존재하는 것이며 맑스가 시장을 자신의 언어로 분석했듯이

그 간극 사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포스트 모더니즘 학자들은 생산관계와 많은 담론들 사이의 관계를 끊어버림으로서

단순히 담론들의 나열만을 열거하며 현실에서의 실천, 변혁과 멀어지게 되었고,

전통적인 맑스주의 학자들은 여전히 생산관계만을 중시함으로서

지금의 다양한 이데올로기, 미디어등이 판치고 있는 사회의 영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서 위와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들 안에서의 차이에 대해 홀은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위와 같은 고민을 했던 알튀세와 다른지에 대해서,

자신이 어떠한 이론을 채택해서 자신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에 대해 디테일한 부분들은 그의 저작을 보면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기존에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학자들과의 차이점을 두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갑니다.  


그의 글들을 읽다보면,

그만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기 보다는 여러군데에서 조금씩, 조금씩 의견을 가져와서

자신의 이야기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인상을 너무도 강하게 받습니다.

사실 그리 새롭지도 않고,

이미 누군가가 했던 이야기를 나열하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제가 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그의 이론, 생각들의 바탕이 '실천'을 그 뿌리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글이 화려하거나, 섬세하지는 않아도

그의 글에는 이 사회의 변혁을 위해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너무도 잘 묻어나 있습니다.

이는 역시 맑스와 같은데,

맑스 역시 이론가로서보다 혁명가로서 누구보다도 실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맑스의 저작에서 그의 실천의지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홀에게서도 역시 그런 실천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만 맑스에게서 나타났던 천재성은 홀에게서는 좀 많이 약하게 나타나긴 하지만 말입니다.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러나 현재 많은 학자들의 저작에서 그러한 실천의지를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

홀이 돋보일 수 있었던 부분은 바로 그런 부분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조만간 그의 문화에 대한 생각에 대한 글을 마저 읽고 나면 그 내용에 대해서도 써볼까 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는 이미 문화가 나타날 국면 - 시장과 해석된 시장과의 간극 - 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며,
 
그의 문화는 분명 그의 실천의지와 같이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주도하는데, 극복하는데,

어떻게 하면 사회의 변혁을 위한 문화가 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 실천의지로 그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2007/05/07 00:13 2007/05/07 00:13

Trackback Address :: http://hyuk.co.kr/trackback/139

Leave a comment !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