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식 대화법과 그 한계

어제는 대전에서 있었던 독서토론회에 다녀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생각보다 수준높은 발제자가 있었기에 재밌게 즐기다 올 수 있었습니다.
발제자의 모든 발제가 끝나고 질의응답이 이루어지는 순간,
'무엇이 옳은, 혹은 좋은 문답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아마 익히 들어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끊임없는 물음으로 결국에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모른다'라는 말을 이끌어내는 기법입니다.
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지를 자각하게 하거나,
당사자가 모르는 새로운 사상을 자각하게 한다고 해서 산파술이라고도 불립니다.
어제는 바로 그러한 대화법이 사용되었습니다.
한 명의 청자가 끊임없는 질문으로 발제자를 당황시켰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청자는 발제자에게서 모른다라는 대답을 이끌어 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청자의 호기심은 끝나지 않아 질문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제 경우가 아니더라도 생각보다 많이 발생되는 것 같습니다.
두가지 측면에서 이러한 대화법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첫번째로는 굳이 무지를 이끌어 낸 상태에서 또 다시 질문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혹은 모른다는 대답을 굳이 확인하여야만 했을까 라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차원이었고,
두번째로는 이러한 문답법이 지식의 높고 낮음을 명확히 규정짓는 행위의 다름이 아닐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첫번째로 제기했던 상대방에 대한 배려 - 다시 말해서 이것이 효과적인 대화, 교육인가라는 물음은
이것이 한 방향의 일방적인 대화로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서 관점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러한 대화법으로 인하여 상대방이 마음을 닫아버린다면,
좋은 교육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대화법은 상대방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가 인지되어야 할 것이며,
상대방을 말 그대로 발가벗기는 것에 대한 수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이는 단순히 상처만을 남기는 대화로 기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뒤로의 교감, 교차의 가능성마저 잃어버릴 수 있기도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대화법이 너무나 많은 폭력성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인데,
그러한 과정으로 가는 물음의 과정 자체가 자신의 지식을 드높이는 행위이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차이를 각인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고저차를 명확히 서로에게 인식시키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파워게임의 한 일환인 셈입니다.
좋은 대화법, 훌륭한 교육법은 무지를 드러내는 것에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음을 보장할 수 있는 대화, 교육이 한 순간의 충격적인 대화, 교육보다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 혹은 우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서로에게 보살핌을 통해서 나눌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단지 대화, 교육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의 전반을 아우르는 모든 운동행위로 확대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소한의 폭력, 최대한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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