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지 선분 - 들뢰즈

올해 2006년도의 목표 중의 하나가 바로
유명한 철학가 '들뢰즈'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8월로 넘어가고 있는 현재,
그의 생각에 대해서 많이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은 된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의 생각중에서 '세가지 선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세가지 선분'이라고 하면 무언가 수학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고,
또 무언가 복잡한 이야기를 하겠구나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이야기도 아니고, 수학적 이야기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중, 고등학교때 화학공부를 조금하셨던 분들이면
몰이라든지 분자라든지 하는 내용을 아실 것입니다.
까먹으셨다고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분자라는 것은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를 지칭하는 것이지요.
그냥 구성요소라고 이해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물은 H2O라는 분자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겠지요.
분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기 때문에,
우리는 분자 하나, 하나의 움직임을 파악하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정개수의 분자를 묶어서 그것의 평균적인 거동을 살피게 됩니다.
이때의 일정개수의 분자를 우리는 몰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각 각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은 제각각 움직이기 때문에 살펴보기 힘들다면,
3반으로 묶어서 3반학생들은 지금 과학실로 가고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과학실로 안가고 집에 가는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잠시 화장실을 들렸다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곧장 과학실로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3반 학생들 대부분은 과학실로 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 때의 경우 학생들을 분자, 그리고 반을 몰로 보셔도 될 듯 합니다.
이제 몰과 분자의 개념에 대해서 조금은 아시겠지요?
들뢰즈는 우리의 삶을 세 가지 선에 비유를 합니다.
하나는 몰적인 선, 두번째는 분자적인 선, 그리고 마지막으로 탈주선을 이야기합니다.
왜 선으로 비유했는지는 계속 읽어보시면 이해하실 듯 합니다.
첫번째로 몰적인 선은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어떠한 집단에 속해버리는 것이지요.
군대에서는 군대에서 행하여야 할 규칙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벗어나면 자신에게 형벌이 가해지지요.
초,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이겠네요.
학교를 안가면 선생님에게 혼나게 되고,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은
직장에서 행하여야 할 규칙을 어기게 되면 그에 따르는 대가를 지불합니다.
이것은 항상 선을 그립니다.
군대에서 지켜야 될 것과 지켜야 되지 말아야 할 것들,
초,중,고등학교에서 지켜야 될 것과 지켜야 되지 말아야 할 것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등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선을 그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내 자신보다는 내가 소속되어 있는 집단에 따라서 행동하게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삶을
몰적인 선에 비유를 한 것입니다.
위에서 '몰'이 무엇인지, 그리고 선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느낌으로나마 파악하신 분들은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두번째를 보면 첫번째 경우가 더 쉽게 파악될지도 모르겠네요.
두번째 선은 분자적인 선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한 수업을 듣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안에는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수업을 듣겠지요.
어떠한 사람은 그냥 학문적 유희때문에 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떠한 사람은 자본주의를 좀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듣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사람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좀 더 깊게 연구하기 위해서 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 듣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수업을 듣는 것은 일정하지만
그 안을 구성하고 있는 학생들의 생각들은 다양한 선을 그립니다.
첫번째 경우의 이것아니면 저것이다라는 이분법적인 선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다양한 선들이 존재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본다면 왜 두번째 경우를 '분자'적인 선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위에서 보시다시피, 선택의 경우는 제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공부해서
오히려 누군가를 더 착취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공부함으로서
그에 대한 문제점들을 어떻게 고쳐나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분자적인 선에는 '선택'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한 선택중 어떠한 것들은 첫번째의 경우를 더 강화시키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선생님이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자신의 강화된 몸을 오히려 학생들의 일탈을 막는데 사용한다면,
그런 경우에는 첫번째의 경우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럴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분자적인 선은 오히려 잘못 선택할 경우,
첫번째 선의 강도를 높혀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볼 것은 탈주선입니다.
위의 두가지 선들이 어떻게든 닫혀 있는 선이라면,
예를 들어서 첫번째 선은 쉽게 아시겠지만 어느 집단의 규율에 갇혀있게 되는 것이고,
두번째 선은 다양한 목적으로 수업을 듣지만
'수업을 듣는데 있어서 떠들지 말아야 할, 지켜야 할 틀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에 비해서 탈주선은 이러한 틀 자체를 넘어서는 행동들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그러면 수업시간에 떠드는 것이 탈주하는 것이냐라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탈주선은 기존의 것들을 넘어서서 하나의 새로움을 창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떠드는 것이 기존에 존재했던 나쁜 가치라고 이미 묶여져 있다는 것이지요.
잘 안와닿으신다고요?
그러면 예를 통해서 알아볼까요?
음악의 예를 들었을 때 기존에는 조성이라는 것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이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어떠한 면에서는 지켜져야 할 규칙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을 창조해 냄으로서 기존의 것에 대한 탈주를 감행했습니다.
미술의 경우에도 이러한 경우가 많겠죠?

사람의 얼굴을 파란색으로 칠하고, 빨간색으로 칠하고 함으로서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색체체계를 파괴했던 야수파들도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살색이라는 표현이 좀 애매하긴 하군요.
살색이라 함은 사람마다 다 다를텐데 말이죠.
다만 적당한 어휘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아서
그냥 살색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에서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도 이에 속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기존의 체제나 틀에서 벗어남으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 탈주선에도 고유한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이 탈주선은 자칫 잘못하면 '죽음'이나 '허망함'으로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고흐'가 그런 대표적 예가 될 수 있긴 하겠습니다.
야수파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고흐의 작품세계 역시
기존의 것들을 넘어서는 탈주선을 그려냈지만,
결국 그는 당대에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맙니다.
학생운동에 뛰어들어서 헌신적으로 운동하는 사람이 - 혁명이라는 것도 역시
기존의 것을 넘어서는 하나의 탈주를 그린다는 점에서 탈주선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
어느 날 갑자기 허망함을 느끼면서 자살을 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폐인이 되는 예는 들어본 적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2000년도 이전 소설들에서 많이 대상화 되었던 인물의 형태중 하나였으니 말이죠.
이렇듯 탈주선은 탈주선만의 고유한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또한 위에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몰적인 선이나 분자적인 선들도 역시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들뢰즈는 확실하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될 선은 '탈주선'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유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탈주선'을 그릴 때에는
신중함을 기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탈주선이 고유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앞의 두가지 선보다는 확실히 우위에 있는, 지향해야할 선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다만 들뢰즈는 그에 대한 고유의 위험성을 알려줌으로서
위험한 탈주의 선을 타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언제쯤이나 전 '탈주의 기쁨'을 누려볼 수 있을까요?
제가 그리는 탈주는 즐거움이 가득한 탈주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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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혁님의 글은 와서 읽을 때마다 하나씩 껍질을 깨어주는 느낌이예요.
하지만 저는 가끔 철학자들의 사상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현실가능한 것일까. 현실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이상이 아닐까.
탈주의 선이 어디까지나 독특한 창의력과 새로움에 대한 도전의식이라고만 해석되면
그것은 실로 모든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되겠지만
들뢰즈가 말했다시피 고유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즉 세 가지 선분이 극도의 위험한 선을 넘었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탈주의 선이라고 말하는게 아닐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탈주를 시도하는 사람은 분자적인 선과 몰적인 선 모두를
정확히 이해하고 자신을 그 선들로부터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에 한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야수파에 대해 예를 들어주셨는데 정말 정확한 예라고 생각해요.
그들이 이전까지 있던 미술에 대해 혁명을 일으키고 그 틀을 깨뜨릴 수 있었던 건
결국 기존의 미술과 그 틀에 대해 보통 미술가들 이상으로 이해하고 정복했기 때문이란 전제를 깔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룰을 정확히 알고 준수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깼을 때 unique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이를테면 처음부터 미술을 모르는 사람이 그 틀을 배우기도 전에 깨뜨려 버렸다면 아무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고양이 발에 물감을 묻혀 이리저리 굴려, 보기에 멋진 그림이 완성되었다 해도
그것은 미술로 인정될 수 없듯이 말이예요.
탈주를 시도하는 모든 자들이 몰적인 선과 분자적인 선을 지키기 싫고 귀찮아서, 가
아니라 그 기본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사회에도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긍정적이고 이상적인 탈주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글을 읽고 생각나는 대로 거르지 않고 다다다다 썼더니 다소 건방진 느낌이군요.orz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T_T
ㅎㅎㅎㅎ 아니에요~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거기까지는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sizk님의 말씀에
완전 동의하게 됐어요.
탈주선을 타려는 사람은 말씀해 주셨다시피
몰적인 선과 분자적인 선을 모두 알았을 때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떄,
더 긍정적이고 이상적인 탈주선을 타게 될거 같아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건방진 느낌이 드는게 아니라,
sizk님의 글에서 강하게 말하고자 하는
열망이 느껴지는걸요.^^
들뢰즈..
흠..
조금 읽었는데요,
갈색이 갈색이 아닐수도 있다는 부분에서 딱 멈춰섰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가는데,
그 한가지로도 너무 여러가지 많은 생각이 들어서요.
히힛 ^-^;;
전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은것 같아요 ㅎㅎ
ㅎㅎㅎㅎㅎㅎㅎㅎ
갈색이 갈색이 아닐 수 있다..
우리가 보는 시각이 시각이 아닐 수 있다.
나중에 너에게 다시금 와닿을 때,
그때 다시 읽어보렴.
철학이 삶에 유리되서 단순한 텍스트만으로 읽힐때에는
그리 의미 있는거 같지가 않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