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민족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듯 합니다.
요즘 가장 인기있는 드라마인 주몽도 그에 대한 이야기일수도 있겠군요.
주몽의 한 장면에서 주몽이 고조선의 지도를 보면서 찬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그당시 지도가 존재했었는지도 의문일 뿐만 아니라
소품으로 쓰였던 지도가 현대지도처럼 너무 자세한 지도라서 더더욱 놀랐었습니다.
민족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사극은 현재의 시점으로 재구성된 것이겠지요.
10년 전의 사극과 현재의 사극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또한 10년 후에 만들어질 사극도 지금 우리가 보는 사극과는 정말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사극을 통해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극을 통해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많았습니다.
그러했던 것이 분단국가라서 그러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방향으로 지나칠 정도로 역사가 서술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조선이라고 하면
마치 고조선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위해서
약 4000년전에 만들어진 '국가'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지요.
사실 그당시에는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전무했고
4000년의 고리로 묶기에는, 인과의 관계로 묶기에는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과거는 현재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구성 됩니다.
현재까지 이르는 역사의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역사가는 자신이 취할 부분을 취하고
버릴 부분은 과감히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역사로 우리에게 대면합니다.
임진왜란때 높은 계급의 핍박때문에 천민들은 침략한 일본인에게 더 호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역사가에 의해서 버려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일제시대를 통해 '반일'의식을 만들려고 했던 자신의 역사관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역사가는 하나의 스토리를 만드는데 있어서
필요한 부분은 취하고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버리게 됩니다.
단일민족의 신화로 쓰여졌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그려졌던 역사는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지금 현재의 한반도의 남쪽에 있는 나라를 중심으로 쓰여졌고
그 나라를 중심으로 모든 이야기는 전개되었습니다.
기존의 역사관은 '단일민족(?)'을 중심으로 기술되었고 또 그렇게 교육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관은 현재 많은 사학자들에 의해서 비판받고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하나의 국가 혹은 민족을 통해서 기술되어진다면
과거에 있는 모든 역사적 사실들은 그에 따라 해석되어질 수 밖에 없다는 비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주류 역사관은
결국 단일민족의 신화를 받드는,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했던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민족, 국가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어떤 이들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으며,
어떤 이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관을 새로 정립하자고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관에 대한 많은 비판중에서
어떤 이들을 역사적 '사실'을 민족과 국가에 의해서 오염시키지 말자는
실증주의적인 역사관으로 돌아갔습니다.
즉, 현재의 역사가 민족이나 국가의 이익이나 관점에 의해서 많이 물들여져 있으니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한 역사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습니다.
과연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사실'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마치 아무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것처럼, 현재의 영향에서 벗어난 순수한 사실을 말입니다.
민족주의에 대해서 비판했던 사람들의 일부는
민족을 벗겨낸 사실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에게 과연 그러한 사실이 무엇이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시간의 굴레를 벗어난, 사회의 환경에서 벗어난 사실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말하는 사실이라는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사실입니다.
그들이 재해석한 사실이고, 그들이 순수하게 만든 그 사실입니다.
어느 사건이 사회에 던져졌을 때,
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많은 관점들이 존재합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관점입니다.
그러할 경우 신문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라는 기사가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본인이 장난으로 이야기했던 것이 남에게 장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경우,
그것은 더이상 장난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안에는 본인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그것이 '사실'일 경우,
남에게 장난이 아니었다는 그것 역시 '사실'이라고 이야기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두가지의 서로 다른 '사실'이 사실은 두가지의 '관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라는 사건이 발발했다라고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의 관점이고,
A라는 사건에 대해서 분석한 것도 하나의 관점이 됩니다.
A라는 사건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관점이 되겠지요.
중요한 것은 'A라는 사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된 A라는 사건'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역사를 실증주의로 해석하고자하는 이들에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수학에서 계산에 의해 딱딱 맞아떨어지는 공식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두가지 큰 교훈을 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역사가들이 이미 정해놓은 틀에서 자신의 역사관을 시작부터 끝까지 정립한다고 하면,
마치 그들이 근대를 거쳐서 탈근대로 나아가는 역사관을 제시했듯이,
우리는 이 역사가 '옳은' 역사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의 역사를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역사가 남성사로 기술되었다면,
그 역사에 하찮은 부분이라고 생각하여 역사의 한구석으로 버려졌던 여성이라는 존재를
다시 넣었을 때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쓰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에게 다른 역사로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역사에서 무엇을 취하느냐, 취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역사의 서술이 180도로 바뀐다면
지금 우리에게 다른 미래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어느 한점을 향해 쓰여졌던 역사는 (근대 - 탈근대의 도식등)
우습게 여겼던 어떠한 것이 포함됨으로서 다시 쓰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역사에 의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유치원을 나와서,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로 들어가고, 대학교를 나온 뒤, 취직을 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그렇게 살다가 은퇴를 하고, 노후를 준비하는
이러한 역사관은 너무나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위의 역사의 정방향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 또한 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개인의 아주 작은 경험이 위의 역사를 새로이 쓰게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순간의 일탈이 가지 않은 길로 인도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일,
기존의 역사를 공부하는 일은
현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마치 과거가 결정된 것처럼, 그렇기에 현재도 결정되고 미래 역시 결정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과거를, 우리의 역사를 다시 돌아봄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다시 살아갈 수 있고,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미래는 이미 와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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