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공학적 사유방식과 그 한계 - 아리스토텔레스적 극 전개와 보편성에 대해

<과학∙공학적 사유방식과 그 한계 - 아리스토텔레스적 극 전개와 보편성에 대해>


  ■ 과학∙공학적 사유방식

과학과 공학에도 그 나름대로의 사유방식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사유방식은 보편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타당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과학과 공학에서 나타나는 사유방식이 무엇인지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 흔히 과학자나 공학자들 사이에서는 공학으로 둘러싸인 것을 제외한 나머지 것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소홀히 하거나 금기시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과학∙공학이라는 학문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로 자신을 지움으로서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학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 현상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자신을 최대한 드러나지 않으려 한다. 관찰이나 관찰로서 획득한 논리가 본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관찰이나 논리는 구성원 모두에게 속할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과학∙공학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학문들 역시 자신을 지우는 과정을 통하여 그러한 보편성을 획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획득한 논리, 보편성이 과연 시간을 초월한, 공간을 초월한1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학∙공학에서 따르는 논리전개 과정, 그리고 그에 따른 모델화 과정을 살펴보면서 그 실과 허를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 아리스토텔레스적 극 전개

‘아리스토텔레스적 극 전개’는 이미 디워 논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진중권이라는 논객을 통해서 알려진 극 전개 방식은 기-승-전-결의 구조를 통하여 극을 전개하는 연출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19세기까지의 모든 극 형식에서 사용되어왔고 매우 동떨어져 있을 것 같은 과학∙공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보고 있는 논문들 역시 이와 같은 논리구조를 취하고 있다. 대부분의 논문들은 ‘서론-실험-결과-결론’2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 내용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과학 사회에서 보일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것은 단순히 형식이 아닌 과학의 일부분이자 속성이다. 내용이 아무리 좋더라도 과학 사회에서 부여된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극 전개는 무려 약 1900년 동안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비추어져 왔지만 20세기 들어서 그 형식이 파괴되어가고 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시작으로 하여,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브레히트는 서사극을 통하여 단순히 극(공학에서는 논문)이 관객에게 보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 안에서 어떻게 관객들과 소통을 할지에 대해 고민을 한다. 많은 분야에서 가장 날카로운 시선으로 기존의 학문체계에 대해 메스를 가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은 과학의 많은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 중 과학에서 현상 분석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한다는 모델화과정에 대하여 다른 논리전개 과정들을 만들어 낸다.


■ 형식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과학∙공학은 이러한 형식에 대해 말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과학적이 아닌 것이며, 공학적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비과학적인 것이다. 따라서 과학∙공학 커뮤니티에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 안으로 다시 피드백 하여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과학은 과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에 대해서만 과학적이라는 자격을 부여한다.

따라서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과학∙공학 커뮤니티 안에서는 결코 이야기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형식이 단순히 형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유체계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틀을 제한하기 때문에 그 틀은 하나의 권력체계로서 작용하게 된다. 이는 과학이 정치 영역과 별개임이 아니라 오히려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간단한 예로 아리스토텔레스적 극 전개는 서양의 사유체계이지 한국 고유의 사유체계가 아니었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보편성 - 모델화

과학적 사실들은 흔히 보편성을 띤다고 한다. 마치 매우 자명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여러 가지 현상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단지 하나에 머무르지 않는다. 같은 5개의 현상을 보고 다른 분석이 가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과학∙공학에서는 이러한 분석과정에서 본인을 지우는 것을 통하여 보편성을 획득한다. 예를 들어 ‘어떠한 기기를 사용하여 분석을 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연구자의 경험을 지우는 행위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어느 현상에 대한 분석틀 - 논리를 제공한다. 이러한 분석틀은 그러한 현상에 대한 모델화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모델이 더욱더 많은 현상들을 포섭할수록 그 모델은 더욱더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 보편성은 어디에 있는가?

보편성이라는 것은 그것이 어느 공간에 위치하는지 상관없이, 어느 시간대에 위치하는지 상관없이 같은 속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공학에서의 논리전개 방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전개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보편성은 보편성이 아니다. 과학이 보편적인 학문이라면 그것은 어느 곳에서 연구를 하든 동일한 진리 값을 지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에서 밝힌 A라는 논리가 10만큼의 진리 값을 갖는다면, 한국에서 밝힌 A라는 논리 역시 10만큼의 진리 값을 가져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대부분 서양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서양철학의 사유들은 서양의 역사, 논리들을 함축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은 서양의 역사를 바탕으로 도출된 것이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하여 도출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렇게 형성된 철학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것도 그 사회 안에서 그 역사를 물려받은 사람에 속할 것이다.

철학이 유럽 서구를 중심으로 기점을 두고 있다면, 과학∙공학은 영미권3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한국 사회 과학∙공학을 이끌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곳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것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렇기에 과학∙공학의 보편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 있다. 자기 자신을 지움으로서 보편성을 획득하려고 했던 과학은 너무나 은밀하고 발견하기 힘든 곳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 그렇다면 그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냥 있는 대로 따라가자니 원하는 해답은 다른 곳에 있는 듯하고, 그렇지 않으려고 해도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다만 명확한 것은 과학은 상당히 가치 지향적인 학문이며, 그 안에서 우리가 끄집어내어 하나, 하나 의심해 봐야 되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될 과학이 무엇인지 고민해 봐야 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1. 모든 시간에 해당되는 것, 모든 공간에서 통용될 수 있는 것, 즉 항시적인 것, 항구적인 것이 보편성의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Back]
  2. Introduction-Experimental-Result-Conclusion [Back]
  3.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영미권은 단순히 국토에 한정되어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집중되는 곳을 미국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미국 안에는 극빈층과 부유층이 함께 존재하고 있고,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지형이 형성된 것이다. [Back]
2007/10/28 23:52 2007/10/28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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