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 이성의 야만에 대해

'계몽'이라는 것은, '진보'라는 것은 항상 빛나는 전망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의 진보를 꿈꾸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진보는 정치적으로의 진보라기 보다는 통상적으로 쓰이는 진보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미래에 더 좋은 길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 역시 위의 생각과 함께 합니다.
'계몽'과 '진보'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이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이들의 생각에서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가는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쉽게 넘겨짚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의 가장 암울한 책 중 하나가 바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쓴 '계몽의 변증법'입니다.
이들이 주로 주목받는 것은 '문화산업'에 대해서 비판했던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너무나 흔한 단어지만 - 문화산업이라는 것은 -
그 때 당시(20세기 중반) 문화산업을 이야기하고 그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오늘은 이들이 이야기한 문화산업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바라보았던 '계몽'과 '진보'에 대해서 바라볼까 합니다.
흔히들 역사는 무수히 많은 '계몽'의 과정을 통하여 진보해 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연에 지배당하던 인간들이 이제는 도리어 자연을 지배하고 있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관념들이 개념화되어서 이해되고 있습니다.
과학은 자연의 겉껍질을 하나씩 벗겨내어 언젠가는 그 속살까지 확인할 수 있을 듯 보이고,
인간의 관념은 무한히 발전하여 모든 것을 인간 인식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얻은 것을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계몽'의 과정은 기존의 세계를 뚫고 나오는 과정입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은 지동설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호머의 서사시는 더이상 역사가 아니라 신화가 되었습니다.
계몽은 기존의 것을 '신화'로 만들고, 합리성과 객관성을 무기로 '계몽'의 세계를 엽니다.
기존에 믿던 것들은 모두 '신화'와 같은 것으로 처리되며
새로운 믿음만이 '계몽'이 되고 역사 진보의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베이컨이 실증주의로 자연의 모습들을 하나씩 드러낼 때,
기존에 자연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경외심, 두려움등은 하나의 '신화'가 되고
실증주의로 밝혀진 실험결과에 대해서 '진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계몽'의 과정입니다.
현재에도 이와 같은 일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유전자를 통해서 성격과 질환등을 변경, 제거할 수 있다는 과학적 믿음은
성격에 대해서, 그리고 질환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여러가지 생각들을 신화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격이 단순히 환경적인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생각은 과거의 기억속에 남아있게 되었고,
성격 또는 유전형질에 영향을 받는다라는 생각이 '진리'가 되었습니다.
하나의 '계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계몽'은 마치 기존의 두려움을 벗어던지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두려운 것들을 하나씩 파헤쳐 나감으로써
이미 알고 있는 대상에 대해 두려움도 경외심도 잊게 됩니다.
우리는 더이상 우리가 고칠 수 있는 질병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적 사실에 대해서 경외하지도 않습니다.
'마법화' 되어 있는 것들을 '탈마법화'하는 과정이 바로 '계몽'입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서
'계몽'이나 '진보'는 항상 빛나는 전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는
'계몽'과 '신화'는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계몽'에 의해서 알려진 사실들이 '신화'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계몽'은 기존의 진리를 깨고, 기존의 진리를 '탈마법화'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단순한 신화로서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계몽'으로서 알려진 진리도 언젠가는 다시 '신화'가 됩니다.
그러기에 '계몽'은 그 안에 '신화'로 전락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계몽'과 '신화'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계몽'은 신비한 것, 마법화 된 과정을 '탈마법화'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자연에 대해 더이상 경외심이나 두려움을 가지지 못한 인간은,
자연에 대해 폭력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변형할 수 있는 것이며, 더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몽'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기에 그것은 '폭력성'을 내재합니다.
마치 새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 알을 깨뜨릴 수 밖에 없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그들의 책인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은 기존의 것을 '탈마법화'하고 '신화'로 만들었으며,
그러한 '계몽' 안에는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처음의 '계몽'은 자연에 대한 폭력, 지배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계몽'은 자연에 대한 폭력, 지배를 벗어나서 인간에게까지 폭력과 지배를 행한다고 합니다.
'계몽'은 기존의 것을 깨는 과정이기에
그 대상은 자연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회사 안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탈마법화'되어 어떻게 움질일지 예상할 수 있고,
그러기에 예측과 조작 역시 가능합니다.
마치 자연에게 행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계몽화 과정은 '실험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계몽의 변증법'의 두 저자는
'계몽'과 '진보'는 우리에게 찬란한 미래만을 가져다 주지는 않을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많은 과학자들이
어떻게 하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지 경주했던 반면에,
이들은 그러한 과정이 얼마나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여기서 이 둘의 말을 받아들이고,
사유의 과정도, 진보의 과정도 멈추어야 하는 것일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생각 중에서 일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이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전 이들이 비판했던 그 내용들을 넘어설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사유에 대한, 실천에 대한, 진보에 대한
새로운 설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의 책 '계몽의 변증법'에서 나왔던
'유목'이나 다른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철학가 '들뢰즈'도
이에 많은 부분들을 답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이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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